전체메뉴

닫기


덕성안내


HOME > 덕성안내 > 덕성발자취 > 설립자 차미리사선생    print

설립자 차미리사선생

차미리사 선생-1879(고종 16)~1955 여성운동가, 교육가 /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근대 민족교육운동의 선구자이신 차미리사 선생(1879-1955)은 일제 강점기 조국의 자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이 필요하며, 특히 여성 교육이 시급하다 여겼다. 이에 차미리사 선생은 3.1운동의 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1920년 여성 교육을 위한 ˝조선여자교육회˝를 결성하였고, 그해 4월 19일 종교 예배당을 빌어 여자야학회를 설치하여 소외받은 여성들을 가르쳤다.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를 설립,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차미리사 선생은 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강연회ㆍ음악회ㆍ연극회ㆍ바자회 등을 개최하였으며, 총독부는 물론 외국인 선교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립ㆍ자력으로 학교를 유지ㆍ발전시킨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한 후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이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서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확대ㆍ발전시킨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으로 바꾸게 된다. 광복이 되자 차미리사 선생은 그동안 계획하여온 여성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한다.
이처럼 차미리사 선생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소외받은 여성들의 교육과 권리 신장을 위해 헌신하셨다.
차미리사 선생은 광복 57주년이 되는 2002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로 추서되었다.

씨(차미리사)는 공상인이 아니요 실행의 인이다. 그는 이론에서 살지 아니하고 실재에서 살려고 한다. 3.1운동 이후에 예서 제서 수 없는 회, 수 없는 단체가 생기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자취를 남겨놓은 것이 몇이나 있나, 이 달에 있던 회는 내 달에 없어지며 금년에 있던 단체는 내년에 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상태이다. 그러나 오직 끊임없이 소리치고 나아가며 끊임없이 발전하여 나아가는 단체가 사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자교육회가 이것의 하나이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3일)

▷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여성으로 교육사업에 독단적으로 종사하여 성공하기는 여사가 효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의 여성 교육 운동에 대한 일관된 노력은 교육기관 설립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결실이 조선여자교육회 결성(1920.2.20)→최초의 부인야학 창시(교회 예배당)(1920.4.19), 염정동 새문안교회(1920.9.18) →근화학원 설립(1923.3.11)→근화여학교로 승격(1925.8.29)→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1934.2.8)→재단법인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1938.10.14)→ 덕성여자대학교로 승격(1950.5.17) 등이다. )

조선여자교육회 관련 사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요구를 따라서 우리 여자가 해산(解産)한 가장 큰 것은 여자 교육회올시다.…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함으로 답답한 형편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약간 느낌이 있어서 동지자 몇 사람이 모혀서 비록 아무 자식도 없으나 가정에 있어서 답답해하는 우리의 자매를 기어이 화를 조직하고 매월 한번씩 통속부인강연회를 열어 집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새로움을 주며 새깨임을 주고자 하고 또 그들을 위하야 간단한 상식을 주려고 미구에 종교예배당 안에서 야학까지 열 계획이외다.…저 가정에 귀멀고 눈멀고 벙어리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하야 보고자 합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4일 : 조선여자교육회 창립 취지)

조선여자의 교육!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올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허다하지만 교육 문제처럼 큰 문제는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문제에서도 가장 급한 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사회라 하는 것은 본래 사나이와 계집 두 가지로 된 것인데 종래에는 계집은 아무 사람다운 값이 없이 살아오지 아니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여자의 큰 수치라고 하나 나는 말하기를 온 인류의 큰 수치라 하겠습니다.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종래와 현재에는 한 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곧 여자 교육의 필요로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1일 : 여성 교육의 필요성)

여자시론(女子時論) 사진본지의 주장은 改造! 改造! 우리 사회 개조할 것이 너무도 만치요만은 제일 먼저 개조할 것은 우리 여자계의 개조. 우리 삼천리에 온 가정을 이상적으로 건설하고 우리 여자계의 압길을 유쾌하게 개조하랴함이외다! 改造! 改造! (동아일보 1920년 5월 10일: 여자시론 3호 광고)

▷ 차미리사는 경성에서 먼 지방에 거주하여 산간 벽지에서 일평생을 노력만 하고 세상 문명의 소식을 조금도 못 듣는 그 불쌍하고 참혹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실생활에 적합한 지식과 문명사회에 합당한 사상”을 소개하는 잡지를 발행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목적 하에서 첫 사업으로 『女子時論』을 인수하여 2호부터 발행하였다.

전국순회강연 관련 사진조선여자들은 무지하고 제한된 생활을 한다. 문자 해독율이 10% 미만이며 지식이라 할 만 한 것은 가정요리, 의복제조, 전야노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활동은 가정살림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여자해방은 조선인 전체사회를 해방하는 한 요소이며, 조선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해방하는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다. 해방이란 여자의 생활범위를 확대하고 그 의의를 심중히 하고 인생의 내용을 풍부히 하고 개성의 발회를 충분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해방을 위해서는 조선여자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자기 생활에 대한 가정적, 국가적, 사회적 장해를 일소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일어나는 운동이 곧 여자해방의 운동이니 처음에는 교육운동으로서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사회운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암흑에 침잠해 있는 조선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향상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하는 조선여자교육회의 하계 지방순회강연은 조선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있는 신운동이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11일 : 전국순회강연 격찬)

조선여자교육회 회장 차미리사는 1921년 조선 최초의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였다. 굴종과 구속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대중을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전국순회강연단은 7월 5일 서울에서의 강연을 시작으로 7월 9일 서울을 떠나 9월 29일 다시 남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84일 동안 67 고을, 만 여 리를 순회하면서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가정부인들을 깨우치는 문화계몽활동을 하였다. (한상권,「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순회 강연활동과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4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5.)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순회강연 활동은 “암흑에 있는 조선여자계에 해방의 복음을 전하는 일대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동아일보》1921.7.11)

또한 조선여자교육회의 사업을 “조선문화사上의 第一記錄(제일기록), 半島史(반도사)의 신기록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남자사회에도 없던 일이며, 조선여자의 운동은 조선여자교육회로부터 시작된다"고 평가하였다.(《동아일보》1921.10.10 )

근화여학교 관련 사진근화여학교는 … 김미리사(차미리사) 여사 외 몇 분 동지의 뜨거운 정성으로 만 여 리의 땅을 밟고 70여 곳 고을을 찾아 이천만 조선민족의 가벼운 주머니 속에서 푼푼전전을 긁어모아 된 것입니다. 조선 십 삼 도를 통 털어 볼지라도 여자의 고등교육기관이 몇 개에 더 지나지 못하지마는 순 조선적인 곳은 더욱 몇이 되지 못하는 터에 이 학교는 그 가운데의 하나 입니다. (조선일보 1926년 1월 21일)

▷ 근화여학교는 조선여자교육회가 전국 고을을 찾아다니며 벌인 전국 순회강연과 순회공연을 통해 이천만 조선민족의 주머니 속에서 푼돈을 긁어모아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의 학교이다

근화여자실업학교 관련 사진조선 여자에게는 지금 무엇보다도 직업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인해방이니 가정개량이니 하지마는 다 제 손으로 제 밥을 찾기 전에는 해결이 아니될 것입니다. 그것이 영구적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 조선여자로써는 그렇게 해야될 줄 압니다. 그러므로 나는 새해부터는 꼭 조선여자에게 실업적 교육을 시킬 기관을 조선여자교육회 안에 두고 싶습니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3일)

이번 실업학교로 다시 내용을 변경한 것은 일반 조선 여성들의 새로운 요구에 의하여 조선 여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생활의식 다시 말하면 경제 및 상업에 관한 지식을 보급시키어 여자로서도 능히 독립한 경제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4월 신학기부터는 실업학교로서의 생도를 모집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 교육방침은 조선 여자들의 실제생화에 즉한 실업교육입니다. (매일신보 1934년 2월 11일)

▷ 1926년 4월 차미리사는 근화여학교 안에 전 조선을 통하여 처음으로 女子寫眞科를 설치하였다. 그녀는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경제적 능력이 있어야 하며, 경제력을 얻고자 하면 실제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므로, 직업을 찾는 여성에게 합당한 사진술을 택하여 직업교육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QUICK
  • 덕성포털
  • 행정포털
  • 도서관
  • 증명서 발급
  • 학사일정
  • 취업정보
페이지 위로

하단 정보

132-714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 144길 33 대표전화(ARS) 02-901-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