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수정일 : 2021-12-03 10:24
차미리사 선생
차미리사(車美理士) 선생 독립유공자 · 덕성학원 설립자(고종 16: 1879~1955)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차미리사 선생은 1879년 8월 21일(음력) 서울 아현동에서 ‘섭섭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열일곱에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고 3년 만에 남편 김씨와 사별한 후 기독교를 받아들여 상동교회에서 ‘미리사’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후 그는 교회의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으로 사회 활동을 하였다.

차미리사 선생은 스물 셋의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1901). 이때 남겨두고 온 어린 딸과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외국어를 배우며 고학하느라 심신이 지쳐 지독한 열병을 앓았다. 그리고 그 후유증으로 평생 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중국 유학을 마친 차미리사 선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1905),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동교육회 발기인이 되었다(1907). 이것이 그의 첫 국권 회복운동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교육 운동, 사회활동, 독립운동, 언론활동 등을 활발하게 펼친 차미리사는 미주리주 캔사스에 있던 스캐리트 성경학교(The Scarritt Bible and Training School)에 입학하였다(1910). 학업을 마친 후, “외국에 있느니 보다는 차라리 고국에 돌아와서 여러 동지들과 손을 잡고 직접으로 사회의 일도 하며 청년 여성을 교육시키어서 우리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귀국하였다(1912). 조국을 떠난 지 10여 년만으로 그의 나이 서른 네 살 되는 해였다.

귀국 후 배화학당 사감 및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교육을 하던 차미리사 선생은 3·1 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산하에 부인야학강습소를 설치하였다(1920). 이는 여성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자립적(自立的)·자생적(自生的)·자각적(自覺的) 여성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차미리사 선생은 여성이 인격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남성처럼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주 교육 대상으로 삼은 여성들은 적령기 학생들이 아니라 여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배움의 기회로부터 소외된 가정부인들이었다. 차미리사는 선생은 순전히 여성들로만 구성된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가정부인들을 대상으로 낡은 관습 낡은 사상 타파, 생활 개조, 여성 교육, 여성 해방, 남녀평등, 신문화 신사상을 고취하는 계몽활동을 하였다(1921). 그리고 전국순회강연회에서 모은 성금으로 청진동에 사옥을 마련하고 부인야학강습소의 이름을 근화학원(槿花學園)이라 하였다(1923).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교육운동을 벌인 결과로 세운 근화학원은 조선 사람의 뜨거운 사랑과 땀과 피의 결정체였다. 이후 근화학원은 근화여학교로 승격되었으며(1925), 다시 재단법인 근화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1934), 산하에 근화여자실업학교를 개교하였다.(1935) 그러나 일제의 압력으로 근화를 덕성으로 개명하였다(1938).

1930년 대 후반 황국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일제는 차미리사가 민족사상을 품은 교육자라는 것을 문제 삼기 시작하였다.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학생들의 머릿속에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기에 열중인 차미리사에게 교장 자리에서 사퇴하라고 압력을 가하였다.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보아 교장직을 박탈하려 한 것이었다. 차미리사 선생은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육 일선에서 물러났다(1940.8). 그의 나이 62세 되는 해였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차미리사 선생의 열정은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차미리사 선생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였다(1948). 일생을 민족의 예속과 분단에 맞서 민족 해방과 민족 통일을 위해 노력한 차미리사 선생은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차미리사 선생 사후 47년 만인 2002년, 정부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가 밝힌 포상 이유는 다음과 같다.

차미리사 여사는 일제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 대동보국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대동’신문 발간에 기여하였고, 귀국하여 배화학교 사감으로 3.1운동을 겪으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순회강연을 통한 민족의 실력양성을 역설하였고, 1923년 근화학원(槿花學院)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 직에서 물러났다.

차미리사 선생관련 기사

차미리사 선생관련 사진 차미리사는 공상인이 아니요 실행의 인이다. 그는 이론에서 살지 아니하고 실재에서 살려고 한다. 3.1운동 이후에 예서 제서 수 없는 회, 수 없는 단체가 생기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자취를 남겨놓은 것이 몇이나 있나, 이 달에 있던 회는 내 달에 없어지며 금년에 있던 단체는 내년에 볼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상태이다. 그러나 오직 끊임없이 소리치고 나아가며 끊임없이 발전하여 나아가는 단체가 사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자교육회가 이것의 하나이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3일)

차미리사 선생은 “조선여성으로 교육사업에 독단적으로 종사하여 성공하기는 여사가 효시”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하셨다.
그의 여성 교육 운동에 대한 일관된 노력은 교육기관 설립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구체적인 결실이 조선여자교육회 결성(1920.2.20) → 최초의 부인야학 창시(교회 예배당)(1920.4.19), 염정동 새문안교회(1920.9.18) → 근화학원 설립(1923.3.11) → 근화여학교로 승격(1925.8.29) → 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1934.2.8) → 재단법인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1938.10.14) → 덕성여자대학교로 승격(1950.5.17) 등이다.

조선여자교육회 관련 기사

조선여자교육회 관련 사진 새로운 시대 새로운 요구를 따라서 우리 여자가 해산(解産)한 가장 큰 것은 여자 교육회올시다. 학교를 다니지 못한 가정에 있는 여자들은 편지 한 장도 자신의 손으로 쓰지 못하고 신문 한 장을 마음대로 보지 못함으로 답답한 형편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약간 느낌이 있어서 동지자 몇 사람이 모혀서 비록 아무 자식도 없으나 가정에 있어서 답답해하는 우리의 자매를 기어이 화를 조직하고 매월 한번씩 통속부인강연회를 열어 집안에 있는 여자들에게 새로움을 주며 새깨임을 주고자 하고 또 그들을 위하야 간단한 상식을 주려고 미구에 종교예배당 안에서 야학까지 열 계획이외다. 저 가정에 귀멀고 눈멀고 벙어리된 자매를 비참한 운명에서 구하야 보고자 합니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14일 : 조선여자교육회 창립 취지)

조선여자의 교육!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올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이 있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허다하지만 교육 문제처럼 큰 문제는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교육문제에서도 가장 급한 것은 여자 교육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의 사회라 하는 것은 본래 사나이와 계집 두 가지로 된 것인데 종래에는 계집은 아무 사람다운 값이 없이 살아오지 아니하였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은 여자의 큰 수치라고 하나 나는 말하기를 온 인류의 큰 수치라 하겠습니다. 수레 두 바퀴와 같은 남녀의 관계가 종래와 현재에는 한 쪽으로 기울어졌으니까 이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 곧 여자 교육의 필요로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21년 2월 21일 : 여성 교육의 필요성)

조선여자교육회 발간잡지

여자시론(女子時論) 사진 본지의 주장은 改造! 改造! 우리 사회 개조할 것이 너무도 만치요만은 제일 먼저 개조할 것은 우리 여자계의 개조. 우리 삼천리에 온 가정을 이상적으로 건설하고 우리 여자계의 압길을 유쾌하게 개조하랴함이외다! 改造! 改造! (동아일보 1920년 5월 10일: 여자시론 3호 광고)

차미리사는 경성에서 먼 지방에 거주하여 산간 벽지에서 일평생을 노력만 하고 세상 문명의 소식을 조금도 못 듣는 그 불쌍하고 참혹한 우리 동포를 위하여 “실생활에 적합한 지식과 문명사회에 합당한 사상”을 소개하는 잡지를 발행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목적 하에서 첫 사업으로 『女子時論』을 인수하여 2호부터 발행하였다.

조선여자교육회 전국 순회강연

전국순회강연 관련 사진 조선여자들은 무지하고 제한된 생활을 한다. 문자 해독율이 10% 미만이며 지식이라 할 만 한 것은 가정요리, 의복제조, 전야노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활동은 가정살림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여자해방은 조선인 전체사회를 해방하는 한 요소이며, 조선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해방하는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이다. 해방이란 여자의 생활범위를 확대하고 그 의의를 심중히 하고 인생의 내용을 풍부히 하고 개성의 발회를 충분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자해방을 위해서는 조선여자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 자기 생활에 대한 가정적, 국가적, 사회적 장해를 일소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일어나는 운동이 곧 여자해방의 운동이니 처음에는 교육운동으로서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사회운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암흑에 침잠해 있는 조선 여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향상을 위해 희생적인 노력을 하는 조선여자교육회의 하계 지방순회강연은 조선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있는 신운동이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11일 : 전국순회강연 격찬)

조선여자교육회 회장 차미리사는 1921년 조선 최초의 전국순회강연단을 조직하였다. 굴종과 구속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대중을 직접 찾아 나선 것이다. 전국순회강연단은 7월 5일 서울에서의 강연을 시작으로 7월 9일 서울을 떠나 9월 29일 다시 남대문으로 돌아올 때까지 84일 동안 67 고을, 만 여 리를 순회하면서 집안에서 잠자고 있는 가정부인들을 깨우치는 문화계몽활동을 하였다. (한상권,「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순회 강연활동과 성격」, 『한국민족운동사연구』4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5.)

조선여자교육회의 전국순회강연 활동은 “암흑에 있는 조선여자계에 해방의 복음을 전하는 일대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 운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동아일보 1921년 7월 11일)

또한 조선여자교육회의 사업을 “조선문화사上의 第一記錄(제일기록), 半島史(반도사)의 신기록이라"고 하였으며, 이는 "남자사회에도 없던 일이며, 조선여자의 운동은 조선여자교육회로부터 시작된다"고 평가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10일)

근화여학교 관련 기사

근화여학교 관련 사진 근화여학교는 김미리사(차미리사) 여사 외 몇 분 동지의 뜨거운 정성으로 만 여 리의 땅을 밟고 70여 곳 고을을 찾아 이천만 조선민족의 가벼운 주머니 속에서 푼푼전전을 긁어모아 된 것입니다. 조선 십 삼 도를 통 털어 볼지라도 여자의 고등교육기관이 몇 개에 더 지나지 못하지마는 순 조선적인 곳은 더욱 몇이 되지 못하는 터에 이 학교는 그 가운데의 하나 입니다. (조선일보 1926년 1월 21일)

근화여학교는 조선여자교육회가 전국 고을을 찾아다니며 벌인 전국 순회강연과 순회공연을 통해 이천만 조선민족의 주머니 속에서 푼돈을 긁어모아 설립한 순수 민족자본의 학교이다.

근화여자실업학교 관련 기사

근화여자실업학교 관련 사진 이번 실업학교로 다시 내용을 변경한 것은 일반 조선 여성들의 새로운 요구에 의하여 조선 여자들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생활의식 다시 말하면 경제 및 상업에 관한 지식을 보급시키어 여자로서도 능히 독립한 경제적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4월 신학기부터는 실업학교로서의 생도를 모집하게 되었는데 물론 그 교육방침은 조선 여자들의 실제생화에 즉한 실업교육입니다. (매일신보 1934년 2월 11일)

근화여학교가 작년 2월 8일 십만 원 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로 인가신청을 하였다는 것은 이미 보도한 바 있다. 7일자 관보에 정식인가가 발표되었다. 학교재단 십만 원의 재원은 대부분 교장 김미리사여사의 사재이고 일부분은 이사들이 낸 것이라는 데, 이로써 이 학교에서는 신학기부터 새로운 진용을 갖추고 학생을 모집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35년 2월 8일)

근 20년 동안 몽매한 여성들을 많이 깨우쳐왔으나 교육을 받고 또 그 위에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자기를 완전히 찾을 수 있다고 다시 깨달은 김미리사 교장은 가진 파란을 겪어가며 분투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끝에 작년 봄 근화학원을 근화실업학교로 개명하고 당국의 인가까지 얻었습니다. 이 학교는 드디어 금년 봄에 210명의 제1회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일보 1936년 2월 19일)